生平简介:
영의정 수항(寿恒)의 아들.
领议政寿恒之子。
1669년(현종 10) 19세의 나이로 진사가 되고, 1682년(숙종 8) 증광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669年(显宗10年)19岁中进士,1682年(肃宗8年)于增广文科中状元及第。
집의(执义) ·헌납(献纳) ·대사간(大司谏) ·동부승지(同副承旨) ·대사성(大司成) 등을 역임하고,청풍부사(淸风府使)로 있을 때인 1689년 기사환국(己巳换局)이 일어나 아버지 수항이 진도(珍岛)에 유배된 뒤 사사(赐死)되자 영평(永平)의 산중에 은거하였다.
历任执义、献纳、大司谏、同副承旨、大司成等官职,1689年任清风府使之时发生己巳换局,父亲被流放到首项岛的珍岛后被赐死,他便隐居在永平的山中。
1694년 갑술옥사(甲戌狱事)가 일어나자 아버지의 죄가 풀리고 그는 호조참의(户曹参议)에 임명되었으나 관직을 받지 않았으며, 그 후에도 대제학(大提学) ·예조판서 ·돈령부지사(敦宁府知事) 등 여러 차례 관직이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1694年甲戌狱事发生后父亲之罪被免,他被任命户曹参议但并未接受。后来被除数大提学,礼曹判书,敦宁府知事等官职也全数推辞。
그는 벼슬보다 문학과 유학(儒学)의 대가로서 이름이 높았고, 당대의 문장가이며 서예에도 뛰어났다.
他在文学和儒学上比为官更要出名,是当时出名的文章家(文章写的好的人),书法也非常出众。
그의 학설은 이기설(理气说)로 이이(李珥)보다는 이황(李滉)에 가까웠으며, 호론(湖论)을 지지하였다. 숙종의 묘정(庙庭)에 배향되고, 양주(杨州)의 석실서원(石室书院), 영암(灵岩)의 녹동서원(鹿洞书院)에 제향(祭享)되었다.
他的学说理气说更接近李滉而非李珥,支持湖论。配享肃宗的庙庭,祭享杨舟的石室书院,灵岩的鹿洞书院。(这个多受宠啊....)
문집에 《농암집》, 저서에《농암잡지(农岩杂识)》 《주자대전차의문목(朱子大全箚疑问目)》, 편서에 《강도충렬록(江都忠烈录)》 《문곡연보(文谷年谱)》, 작품으로 글씨에 《문정공이단상비(文贞公李端相碑)》 《감사이만웅비(监司李万雄碑)》 《김숭겸표(金崇谦表)》 《김명원신도비(金命元神道碑)》의 전액(篆额) 등이 있다.
文集有《农岩集》,著有《农岩杂识》《朱子大全箚疑问目》,编著有《江都忠烈录》《文谷年谱》《文贞公李端相碑》《监司李万雄碑》《金崇谦表》《金命元神道碑》《篆额》等。